< 건축에 대하여 >

▷ 건축 작품집_1-정기용과 서정일 대담

▷ 건축 작품집_2-김헌서문

▶ 흙과건축-잊혀진정신(사람건축도시)





사람, 건축, 도시 (현실문화 2008)에서 발췌
> 흙과 건축: 잊혀진 정신 - 오래된 가치


내가 흙과 건축을 결합하여 생각하게 된 것은 비교적 오래전부터다. 그것은 단순히 흙이라고 하는 물성에 대한 특별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오래된 기술의 현재화’라는 경이로움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프랑스에서 건축수업을 받던 때 모든 학생들이 마치 성서처럼 읽던 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집트의 건축가 하산 화티가 오래된 흙건축의 기술로 재현한 《이집트 구르나 마을 이야기》를 읽고 나서 나는 전통과 현대, 기술과 건축, 삶과 건축, 건축과 사회, 건축가와 윤리 등의 문제를 접하게 되었고, 그런 것들이 특히 당시 제3세계로 분류되던 나라들에서 부족한 것들이라고 인식하였다.
나는 프랑스에서 모더니즘의 건축을 배웠지만, 세계 여러 나라 소위 개발도상국들에서 진행되던 모더니즘의 양상이 어색할 뿐만 아니라 어느 곳에서도 적절하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것은 바로 각 지역마다 오랜 역사 동안 일구어낸 그들의 삶과 건축을 변화하는 시대에 맞도록 재구성할 기회를 만들 겨를도 없이 모더니즘이라는 급물살에 내던져졌기 때문이었다. 모더니즘의 강요된 수용은 비단 건축만의 일이 아니라 역사, 정치, 경제 그리고 일상적인 삶 속에까지 침투하는 세계사적 물결이었다.
그러한 물결 가운데 내가 목격한 큰 축격은 ‘새마을운동’을 통해 이루어졌던 소위 농촌추택환경개량사업이었다. 60년대 초가집은 가난의 상징이었고, 전근대의 표상이었다. 농촌의 근대화 작업은 전통문화의 청소 작업이었고, 농민들 스스로를 근대화의 지진아로 만들어 의식을 개조하는 사업이었다. 그런 격동기에 지구상 유래가 없던 농촌주거의 개조사업은 나에게 농촌지역의 옛 살림집들을 돌아보게 하였다. 당시만 해도 고건축연구의 대상 속에는 소위 토속건축이라 할 농가건축은 누락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간혹 있어도 평면에 대한 분류 정도만 있었지 어떻게 지었는지에 대한 자료는 없었다. 그리고 한국에는 하산 화티와 같은 건축가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몇 가닥의 목재를 제외하면 온통 흙으로 만들어진 토담집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시피 하였다. 수백 년 동안 이 EKd에 세워졌다 사라졌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흔적들이 흙속에 묻혀버리고 만 것이다.
바로 흔적조차 없어 사라진 흙집에 대한 추적은 나를 안동 하회마을 이규성 씨 댁으로 인도하였고, 거기에서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잊혀진 정신과 만나게 되었다. 연기로 그을린 두툼한 토벽, 뒤뜰로 난 조그만 창, 방에서 느끼는 안온한 채취, 부엌 문틀사이에 누워 있는 흙들, 벽체마다 남겨진 북촌댁 쪽담틀 자국. 어느 하나 내가 그때까지 상식적으로 알던 농촌의 살림집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집에 살던 할머니의 거침없는 말씀은 심벽집에서 기거하며 느꼈던 기억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런 집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엔 정말 따뜻하지“라고 말이다. 다소 과장되었다 할지라도,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정말 이상적인 집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여러 지역에서 담집들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정읍 근처에서, 그리고 예산 구억말에서. 흙을 담틀에 넣고 다져서 만들어낸 벽체가 드러날 때마다 나는 큰 감동에 사로잡혔다. 땅에 누워 있던 흙을 길어 신체에서 나온 힘으로 다지고 땅 위에 수직으로 세운다는 것, 그렇게 해서 공간을 만들어나간다는 것은 위대한 일처럼 보였다. 지구의 살과 피부로 사람의 집을 짓는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은 없는 듯 보였다. 특히 지금 이 시대와 같이 환경과 생태의 문제가 심각할 뿐만 아니라, 소위 지역주의 건축이 여러 각도에서 논의되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전통을 현재화한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일이다. 흙의 본래적인 속성들을 이 시대의 삶 속에 투영하는 일, 지속가능한 ‘오래된 가치’를 지금 여기 이 땅에 복원하는 일, 그것이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흙으로 어떻게 건축할 것인가가 아니라, 왜 건축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들에 대한 비유적인 답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우리들이 공유해야 할 가치들의 복원이기도 하다. 이것은 비단 건축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를 다시 한 번 가늠해보아야 할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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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의 명령
흙과 건축은 이 시대를 바라보려는 또 다른 태도다. 많은 사람들이 21세기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미래를 예축하는가 하는 데 있다기보다 지금 경과 중인 우리들의 일상 속에 미래가 있음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견고히 해야 할 방향들을 짚어보는 것이다.
정보화시대가 왔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정보화인가? 정보화기술이 진정한 의미의 이성적 사회를 건설하는데 이바지하지 않고 인간을 지구상에서 축출하는데 기여한다면 그것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신자유주의와 무한경쟁시대라는 협박 앞에 다수의 사람들은 어떤 세계를 염원할 수 있는가? 고삐 풀린 말처럼 질주하는 세계경제 체제를 제어할 또 다른 대안은 없단 말인가. 고뇌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녹색평론》(2000년 11·12월호)에 실린 조이의 글은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컴퓨터 과학기술자로서 미국의 대표적인 컴퓨터 기업의 하나인 ‘선 마이크로시스템’사의 대표 과학자이자 공동 창립자이기도 하다. 빌 조이는 〈미래에 왜 우리는 필요없는 존재가 될 것인가〉라는 글에서 자신이 그토록 신봉하던 현대기술에 대해서 큰 회의를 던지고 있다. 빌 조이는 “21세기의 테크놀로지―유전공학, 나노테크놀로지, 로봇공학―는 너무도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기 EOans에 그것들은 전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사고와 오용을 낳을 수 있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즉 20세기의 대량 파괴 무기로 사용된 NBC(핵, 생물, 화학)기술들은 대부분 정부기관의 실험실에서 개발된 군사용으로 비교적 통제 가능하였으나 21세기의 GNR(유전자기술, 극소기기술, 로봇기술)기술들은 명백히 상업적인 용도를 갖고 거의 예외 없이 기업들에 의해 개발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상업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이 시대에 테크놀로지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엄청난 돈벌이가 되는 마술적인 발명품들을 거의 끊임없이 내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속에 빠져들고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고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 속의 다양한 경제적 인텐시브와 경쟁 압력 내에서 이들 새로운 테크놀로지들이 제시하는 약속들을 공격적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급기야 만일 급진적인 기술이 기계들의 자기복제시대를 앞당겨 인간이 기계에 복종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느껴지는 시기에 인간은 더 이상 지구상에서 필요 없는 존재일 것이라는 경고다. 중단할 수 없는, 브레이크 없는 기술의 시대에 우리는 그들을 지상으로 내려오게 하여야 한다.
조이도 결국은 아탈리의 《합리적인 미치광이: 자크 아탈리의 21세기 형재애 유토피아 제안》(1999)이라는 책과 달라이 라마의 ‘새 천 년을 위한 윤리’라는 강연에서 앞으로 갈 길을 제안한다. “시장사회의 진화를 보면서 일부 인간의 자유는 다른 인간의 소외를 초래한다는 것을 이해하였고, 그들은 평등을 추구하였다”라는 말에서 인간들이란 바로 형제애를 존중하는 인간이며, 형제애만이 개인의 행복과 타인들의 행복을 조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달라이 라마가 이야기하는 타자에 대한 사랑과 자비심을 형제애와 공명하는 것으로 보고, 그는 우리 사회가 보편적인 책임과 우리 존재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보다 강력한 개념을 발전시켜 개인과 사회를 위한 적극적인 윤리적 행동의 표준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타주의란 타인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남에게 이(利)가 되게 행동하는 것이다. 이 말은 상식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함을 담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서구문명이 실증주의에 기초한 인식론의 극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구 합리주의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이분법과 삼단논법을 허물면서 비선형적, 비대칭적 시간관에 기초한 인간의 또 다른 가능성을 인정하는 태도다.
21세기는 바로 뒤랑이 말하듯 “다양한 인류학적 가치들이 회복되는 시기가 될 것이다. 하나의 문화의 이름으로 짓누르던 시대가, 20세기에 인류가 행하고 겪었던 범죄 및 실패와 함께 영원히 종말”을 고하고 각기 다른 문화를 새로운 반열 위에 위치시켜야 할 것이다. 그것은 거창한 이념에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매일매일의 일상 가까이에서, 개인의 참된 가치를 상품 속에서가 아니라 그 외의 여러 관계 속에서 이루어내는 것이다. 이는 “나를 한 영토에, 한 도시에, 그리고 내가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자연환경에 연결시켜주는 모든 것들이다. 바로 이것이 하루하루의 자그마한 역사들인 것이다. 공간 속에 결정되는 시간, 이렇게 하여 한 장소의 역사가 개인적인 역사로 되는 것이다.” 일상 속의 아주 사소한 형상들, 하찮은 것들, 덧없는 것들, 현재의 정복자, 시사적인 것들에 주목하는 ‘사회학적 미학’의 창시자인 마페졸리가 한 말이다.
그래서 나는 먼 데서가 아니라 아주 가까운 우리들의 땅과 역사와 그 속의 일상적 호흡 속에 우리들이 의연하게 지속시켜야 할 우리들의 건축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바로 저 흙 속에서도 길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잊어버린 우리들의 신화를 되찾아야만 할 것이다. 이것은 상식의 명령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이 시대의 의미 있는 물줄기를 형성해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옛집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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