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축에 대하여 >
▷ 건축 작품집_1-정기용과 서정일 대담
▶ 건축 작품집_2-김헌서문
▷ 흙과건축-잊혀진정신(사람건축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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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2010 정기용 건축 작품집 (현실문화 2011)에서 발췌
> 서문: 페리파토스의 관념, 그 현실_태(現實_態)
뒤늦게 ‘걷고 싶은 길’이라고 새삼스레 별칭이 붙은 곳들이 늘어간다. 아이러니는 많은 경우 그 길이 이미 오랜 시간 그곳에 그렇게 놓여 있었다는 거다. 그럼에도 이 말이 주는 어감이 우리 뇌리에 부딪는 순간, 그 경험이 줄 풍요로움의 예감에 우리의 호흡엔 미세한 변화가 인다. 또 하나의 아이러니는 그 명칭이 주는 외연(外延)에서 가장 무게가 나가지 않는 부분이 ‘걷는’일인데도 말이다. 지금껏 수차례 오갔을지라도 그 길은 매번 새로이 건지게 될 소소한 발견과 모험을 은밀히 약속하는 경로일 거다. 또 문제의 그 길은 더 이상 풍경의 의미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 길은 어느새 우리에게는 어떤 심리이거나 정서이고 의식이며, 시지각적 경험에 대한 기대감 따위로 번역되어 있을, 어떤 내면적인 소요(逍遙)의 세팅일거다. 작가 정기용의 이 아카이브는 분명 그 같은 예감이 가득 깃든 맘으로 거닐고 싶은 세계이다. 더구나 동시대 우리 건축인들만 놓고 봐서는 기꺼이 홀로 나서서 길을 잃어도 개의치 않아 할, 짙은 사상과 정신의 숲길일 수도 있다.
위의 소요의 개념, 그릿 철학의 관념으로 치자면 페리파토스(Peripatos)가 누군가의 의식이나 정서와 결합하면, 대체로 야인 내지는 어떤 국외자(局外者)들의 내면과 여러모로 닮아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아테네에 그 흔한 땅 한 평 취할 여건조차 없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포함하여, 알다시피 그런 인물들은 하등의 정처나 터전 따위를 물리치는 편이며, 종종 풍류나 자적(自適)의 심상을 지니고 있기 쉽다. 또 마땅히 그들은 거리낌 없는 행동이나 독자적인 실천, 겸허와 내핍, 당대의 지배적인 것들에 대한 외면 또는 거리두기 등의 기질을 골자로 하는 프로파일을 유지한 자들일 거다. 하필 나는 이 모노그래프에 기재된 여러 계열의 코드들로부터, 무엇보다도 이 페리파토스의 관념들이 정기용이란 작가의 내면과 뚜렷한 화학반응을 일으키고 있음을 본다. 그의 건축엔 우선 그 스타일만 두고 보아도 애초부터 독자적인 스쿨링의 징후가 두드러진다. 그와 동세대의 작가들에겐 여느 대가나 원류적인 인물에 기댄 초년의 집약적인 사사가 흔하지만, 그의 배경엔 이 부분이 생략되었다는 점도 아마 그 큰 이유 중 하나일지 모른다. 학습 초기부터 그는 당시 지배적인 현실의 국외자였던 셈이다. 형상을 깎아 다듬고 물질을 어루만지고 공간을 구축해내는, 그 관능적인 게임의 와류에 성큼 들어서서 휘말리는 일에 몸이 달아야 할 시기를, 청년 정기용은 남다른 시간들로 메워 나갔던 것 같다. 도시와 역사와 인문 사회 관련 제반 이슈들이 어떻게 건축과 맥이 닿을 수 있는가를 꼼꼼히 가늠하는 시간들이었을 거다. 건축의 ‘만들기’라는 그 비좁은 틀 밖으로 떨어져 나가 큰 폭으로 소요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더구나 이미 미술을 전공한 바 있어 누구 못지않게 가장 자신하던 것이 스스로의 ‘손’이었음에도. 결국 이런 과정이 내가 그의 작업들에서 특유의 유전자 배열을 읽게 되는 또 하나의 연유가 아닐까 싶다. 근대의 정신을 문화인류학이나 사회학의 시선으로 접근하되 그 물화된 실체는 정작 사적인 속성으로 가득한 풍경, 굳이 말을 만들어 붙이자면 소시오스케이프(socioscape)의 씨앗을 이루는 배열이라 할까. 한편으로 건축을 통해 작가 본연의 에고가 그 부푼 크기를 자칫 드러내게 되는 경로는 다양할 터이지만, 이를 슬쩍 엿볼 수 있는 척도 중 하나는 대자연이란 컨텍스트와 관계를 맺는 방식일 거다. 이 경우 정기용의 작업들은 하나같이 그 볼륨이 가능한 한 아래로 두드려 다져져 있다. 대지에 될수록 눌어붙게 하는 형상이나 배치, 이와 더불어 거의 전적으로 수평적인 제스처들만 두드러진다. 건축의 윤곽은 장소 본연의 윤곽이나 인근 풍경의 고유 스카이라인으로 회귀되는 것이다. 앞서 야인의 의식과 연관 지은 내용 중에 한편으로 겸허나 절제의 성분이란 것이 여기서 감지된다고나 할까. 곁들여 작가의 의식상 내핌의 성분 역시 여기 수록된 그의 작품마다 흥미로운 패턴으로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는 생각이다. 예컨대 프로젝트의 예산이 본디 터무니없이 낮았다 해도 꼭 그답게(?) 한 것 같고, 반면 풍족하다 해도 어쩐지 그저 그답게 해버렸을 거란 인상 말이다.
핀란드 현대 건축의 지성 팔라스마가 최근에 ‘저항의 건축’이란 비교적 강한 어휘를 내세워 자신의 뜻을 피력했던 일을 기억한다. 갈수록 지나치게 말초적인 감각 위주로 흐르는 지금의 건축, 또 그들이 저널리즘과 필요 이상으로 엉켜 뒹구는 행태를 그 동안 두고 보기 힘들었나 보다.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내용의 진정성(authenticity)을 건축이 나서서 사수해야 한다고 믿는 그는 마침 건축이 삶을 ‘조직’하는 일이라 줄곧 말해온 정기용과 짐작컨대 여러 면에서 견해를 같이 할 것 같다. 현대 사회가 한층 표피적인 가치 쪽으로 치우친 건축에만 탐조등을 비추는 동안, 팔라스마는 그 경험의 본질이나 실체가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을 여러모로 정리하고 있다. 특히 건축의 스타일리시한 측면이나 패션, 마케팅적 요소 따위에 초점을 둔 흐름, 작가 중심의 지극히 사적이거나 편향된 개성, 특정 문화권의 취향, 상업주의의 무분별한 개입 등이 꽤 오랜 시간 건축계의 전위에 머물고 있는 큰 조류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게다가 이 같은 흐름의 주도권을 쥔 저널이나 매체를 축으로 건축가들의 이름이 다루어지는 (유사) 스타 시스템의 준동 또한 빼놓을 수 없겠다. 어찌 보면 그 한정된 세력이 보이는 경도(傾倒)란 것이 그다지 용인키 어려운 현상일까 싶기는 하다. 하지만 이러는 사이 미디어가 비추는 스포트라이트 외곽에 처한, 보다 근원적인 경험이나 원칙에 충실한 건축 행위를 우리 사회가 단지 진부한 부류로만 인식하게 되는 문제가 잠재한다고 그는 보고 있다. 이쯤이면 현대 건축이 벌이고 있는 그 시크(chic)한 파티, 한편으로 엘리트주의란 것이 아주 쉽게 도취될 만한 강한 극성(劇性)을 띤 시류임이 확인된 바, 팔라스마는 이에 물든 커뮤니티와 뚜렷한 거리를 둔 야인의 의식으로 그들과 대항 점에 놓인 사고와 작업을 상정하는 것이다. 어쩐지 일본의 후지모리나 내 동년배인 호주의 숀 갓셀, 또 오랜 세월 이방인을 자처하듯 주변을 서성이는 프랑스 현대 건축의 큰 선배 클로드 파렘 같은 작가들이 문득 위의 야인(임시로 칭하길)이라는 카테고리에 간단히 들 것 같은 생각은 왜일까. 이들 모두 정기용이란 인물을 염두에 두다 보니 떠오른 이름들인 건 물론이나, 당장 마음속에 짚이는 그들의 몇 가지 미덕에서도 연유한 추측일 듯하다. 즉 진정한 세계 속에서 건축이 경험되어야 한다는 그 치열한 신념은 말할 것도 없으며, 건축의 사회 문화적 맥락이 이들 작업의 시적인 속성과 평화롭게 만나고 있다는 점, 동시대 건축의 엘리트들 간의 포토제닉한(?) 형상 내놓기 경쟁을 마치 곁에서 비웃는 듯 한 행보, 여타 유파로부터 자유로우나 한편으로 소소한 모험이나 상쾌한 탈선을 일삼는다는점, 장소나 프로그램으로부터 물성이나 형태의 테마가 거의 자생적으로 추출되고 있다는 점, 각자 특유의 위트와 풍류와 자적으로 지극히 독자적인 정신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 따위 말이다. 도시와 건축과 풍경에 관해, 또 현실 속 그 경험에 관해 꽤 심층적인 언설을 내놓으며, 나름 현학을 드러내던 인물들일지라 해도 실제 작업은 정작 거의 예외 없이 그들의 사상과 심각한 괴리를 보여 왔던 불행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게 과연 그리도 어려운 일이었던가. 정기용을 비롯해 앞서 거론된 한층 ‘왜소한’이름들은 그런 이들을 향해 실질적으로 어떤 대항적인 해법이란 걸 제시해온, 어떤 평형추의 중량을 유지하는 상징들이랄 수 있다. 이런 뜻이라면 위의 가칭 ‘야인’이란 카테고리는 내가 이 글에서 급히 주조한 바 파라모던(para-modern)이란 카테고리로 슬쩍 바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과연 ‘저항’의 탄성에까지 이를까마는 정기용의 의식 역시 팔라스마의 것과 심도 있게 공명하고 있을 거란 심증은, 위의 이야기 말고도 본인의 20여 년에 걸친 아카이브 전면에 걸쳐 고루 묻어 나온다. 우선, 같은 기간 현대 도시․건축계의 중원에서 급가열과 급랭 사이를 오가던 기존의 경향들(패드, fad)과 나란히 그의 작업들을 놓고 연대순으로 병치해보는 일은 무의미하다. 예컨대 디자인 미디어의 변화에 따라 순식간에 번졌던 형태 언어들의 생성․도출 방식이나 한때 유럽의 아카데미 중심으로 열병처럼 도진 바 있던 판에 박힌 지형-풍경 논의나 갈수록 한없이 얇고 가벼우며 투명하고 섬약하고 창백해지는 의사(疑似) 테크노 건축의 표정들 따위의 패드 말이다. 또 근거를 잃은 건축의 낯설게 하기나 내용 이상으로 공간의 내외부를 지나치게 극화하는 일도 위의 패드에 넣어야겠다. 이 모두 센세이셔널리즘에 초점을 둔 저널과 현대 작가들 사이의 오래된 거래 요건일 것이며 팔라스마나 정기용이 불편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우울한 이벤트일 것이다. 반면 섞어 놓으면 과연 어느 것이 초기 작업이고 어느 것이 최근 것인지조차 판가름하기 쉽지 않은 정기용의 건축은 그가 때마다 당대의 시류와 겪어 왔던 불화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한다. 작업 하나하나는 이미 충분히 진화를 이룬 그의 사고가 단지 내부적으로 겪고 있는 일들의 독자적 선험적 연대의 기록이란 뜻이기도 하다. 단지 느낌이지만 그의 건축이 마치 그를 대신해 매번 우리 시야의 전면에 현란하게 나서던 동시대 인기 대형 작가들의 작업에 대해 무언의, 하지만 통렬한 시선을 보내는 것만 같다. 한눈에 보아도 그런 류의 건축에서 상정된 장소나 주어진 프로그램에 대한 최소한의 판독이 생략되어 있거나 아예 이를 애써 외면한 흔적까지 보여서일까. 설사 그것들을 최소한으로나마 읽었다 해도, 그러기가 무섭게 그것이 데이터가 되었든 시지각적 험이 되었든 컴퓨터의 소프트웨어에 성급히 조제해 넣은 일들에 대한 시선일 것이다. 또 그런 일 끝에 CG가 잉태시킨 예의 숭고함과 도그마 넘치는 형상의 씨앗들을 모니터 화면 속에서 이리저리 토스하며 주조해내는 건축에 대한 엄중한 지적이기도 하리라. 그래선지 개인의 지성이나 사상, 사적인 경험에서 자생하는 초기 발상의 레퍼런스는 여기서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근친 간의 교배를 연상시키듯 그들의 매우 좁고 빈약한 서클에서 즉각적으로 돌려가며 배란된 이미지나 공간의 아이디어들, 그 유형학을 쉽게 초월하지 못하는 것이다. 정기용의 그것과 달리 ‘현실’의 부재를 연료로 하는 건축 내지는 그 실종을 필연으로 하는 건축에만 유독 그 냉건한 시선이 닿아 있다 할 유형학이리라.
좀 더 구체적으로 정기용의 작업들 일련을 살펴보자면 기타 우리 시대 명인들의 경우에서는 흔하듯 초기 사고 단계부터 타성에 절은 본연의 스타일 언어를 성급히 들이민 흔적을 쉬이 찾아내기 어렵다. 마치 각기 과업마다 주어진 장소나 기획, 프로그램 전반이 당장에 면한 이슈들, 또는 이들의 결집체가 가져다줄 궁극적인 경험, 즉 앞서 팔라스마가 뜻한바 엄중한 ‘현실’에만 애초부터 집요하게 눈이 닿아 있었다고나 할까. 프로그램-공간이라는 내부 논리이거나 지형-화해, 컨텍스트-수용, 자연-함입 등 장소에 연계된 외부 논리가 그 시원적인 바탕임이 분명하다. 그들이 일거에 그의 의식 속으로 소환되면서 이들을 아우르기 위한 전체론적(holistic) 사고가 그 궤도에 오르는 걸 거다. 각기의 논리가 생각을 어딘가로 수렴케 한다기보다 오히려 갈수록 다행의 지향 점을 그의 의식의 장(長)이란 곳에 뿌려놓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 사이 이들 논리를 상정하는 비교적 차분한 윤곽선이나 근간이 되는 다이어그램들이 무순으로 추출되는 모양이다. 이 같은 내 생각을 마치 예증이라도 하듯 작업에 임하는 그의 손에서 그저 각기 나름의 논점 내지는 직감에 따라서 하나 둘 캐주얼한 선들이 마찰 없이 잉태되는 것만 같다. 그것들이 일단(一團)을 이루어가는 동안 비로소 그 공간이 품고 있던 서사는 비밀스레 말문을 트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것이 평면이든 단면이든 대개가 하드라인을 곁들인 2차원적인 부분 스케치임에도 하나같이 넋을 잃고 바라보게 하는 그의 렌더링들을 보아도 그렇다. 어쩐지 주변 풍경의 인상과 특질이 용융된 듯 한 회화적인 퀄리티가 그것들 속에 물씬 발하고 있어 이 역시 공간이 주도하는 사건의 전이, 확대를 예감케 하고도 남는다. 이는 분명 100권이 넘는 유려한 스케치북을 남기고 있는 헤르만 헤르츠베르거의 것들에서조차 쉬이 건지기 힘든, 차라리 스카르파의 전설적인 작업 드로잉들이나 보이던 정기용 특유의 습윤함이 깃든 필치 탓일 거다. 그 선들의 놀림은 무심히 따라 읽는 이를 어김없이 도취시키는 직관이나 결행의 힘으로 번들거리며, 사고의 궤적에서 이른바 주저 흔(痕)이란 걸 여간 찾기 어렵게 한다. 게다가 종종 시간차를 두고 기록되었음직한 수많은 그래픽 메모의 흔적들은 그가 품었던 여러 착상의 두터움이나 폭을 여지없이 암시할뿐더러 그 다양한 선들의 두께나 움직임 역시 순간 그의 뇌리를 스치던 수많은 옵션들이 나름의 우선순위를 다투고 있었음을 증언하는 것만 같다. 바로 그 필치들이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가 엮이면서, 앞서 말한 예감되던 사건이란 것이 그 궁극의 내러티브에 안착할 것이다. 한때 미지였던 그의 건축을 감싸게 되는 조형이란 것이 여러 모티브들을 딛고 이제야 그 전모를 서서히 드러내는 류의 골자를 가진 서사이기도 하다. 관조와 해석과 숙고로 이루어진 그의 브러시가 다채로운 경험의 스트로크들을 문제의 현장에 새기고 있는 것이다. 오직 정기용답다 할 사고의 형국을.
한편으로 그의 건축이 어떻게든 시적인 속성을 함유하고 있는 까닭이라면 한층 온화한 특질의 2차적인 문법들을 치밀하게 운용하고 있어서일 거다. 그것들은 대게 미시적 경험이나 중심의 공간 레이아웃에서 움트기 시작해 곳곳에 홀연히 벌어진 틈이나 여백 속으로 번지면서 매번 다채로운 형식으로 그의 작업에 개입하는 것으로 감지되곤 한다. 헤아려보자면 이는 물성이 발하는 질감이나 온도감일 경우도 있고, 양질의 빛과 신선한 기류에 대거 길을 터주는 일이거나, 세심히 쪼개진 구체들 간의 서로 리드미컬하게 버석거리는 모습이거나, 또 우리에게 친밀한 단계까지 한껏 낮추어진, 남다른 스케일감 속의 살가운 어울림일 때도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조심스레 배분된 그의 매스들은 저마다 마치 어떤 제유법적인 의미가 밀실히 충전된 듯 보인다. 한두 단계 하위 구성의 공간이나 물질임에도 각자로부터 이미 총체적인 사건의 전말을 가늠케 하는 징후를 읽게 하기 때문이랄까. 물론 그 응결된 구체들 사이에도 그가 우랜 시간 세계와 현상을 읽는 하나의 유효한 방식으로 일관되게 펼쳐온, 들뢰즈적인 차이와 반복의 관념들이 잠복해 있을 거다. 이쯤 되면 어느 시각으로 보아도 그의 초기 사고에 뛰어드는 감성이란, 짐작컨대 어떤 종류의 뭉뚱그려지거나 한 덩이로 이루어진 도발적인 형상, 또 이에 대한 매료는 단연 아님이 확실하다. 차라리 장소의 곳곳에 본디부터 떠돌던 공기 속 촉촉한 입자들이 결로라도 된 듯 몇몇 관념적 이슬방울들의 자취가 건축이 되고, 또 그것들 간에 서로 알맞은 장력이나 반력을 부여해 그 배열의 위치를 꾀하고 있다는 것에 가깝다. 아마도 그는 그 결집체들을 어딘가 안착시키기보다 이들 간에 갖가지 당면한 사연으로 탈구(脫句)나 변위가 발생토록 꾀하는 데 더욱 마음을 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여러 모로 건축의 도취적이거나 도발적인 면모가 뛰어들어 안기듯 쉽게 타재 가능한 예의 형태 언어라든가, 스타일, 이미지, 트렌드, 패션 따위의 외향적 언어들은 일찌감치 보다 본질적인 경험에게 자릴 내주고 있다고 할까. 그래서인지 개인의 건축구성 어법상 일관되면서도(homogeneous) 그럴듯하다 새길 만한 무엇, 다시 말해 큰 시야로 보아 과연 정기용스럽다 칭할 만한 고유의 형상 언어를 규정해보려는 생각은 거의 의미를 잃는다. 이것의 자락이 어느덧 잡힐 만하면 그의 이 아카이브 속 몇 프로젝트 안 가서 슬며시 실종되는 일이 거듭되기 때문이다. 이는 역시 과작임에도 사리넨이 남긴 그 보석 같은 건축들로부터 한때 우리가 흠씬 느낀 바 있던, 모더니즘 기반 작가에겐 결코 흔하지 않은 헤테로적 감성이라 할 수 있다. 오로지 장소와 프로그램에 대한 집요한 이해와 번역만이 낳을 수 있는 건축들, 그 서로 판이한 변종들의 계통도랄까. 개인 건축의 독자적인 스타일이란 영역은 분명 현대 작가들이 본능적으로 쉽게 기대고픈 정처 같은 세계이다. 한편으로 이를 자신의 회향적인 존재감을 서둘러 심게 될 터전으로 삼기도 너무 쉽단 걸 우린 안다. 그렇다면 그들 대부분으로부터 일찌감치 거리를 두고 외유에 나선 인물 정기용 본연의 내면에선 그 ‘정처’와 ‘터전’마저 무심히 물려지고 있다는 뜻일까.
소요와 외유의 관념을 이 아카이브를 통해 채취한 정기용의 의식 내면 풍경으로 제한해 지금껏 이 글을 이끌어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과 연관 지을 수 있을지 모르나 우연처럼 그가 마련하고 있는 공간적 장소적 세팅을 통해서도 그 관념은 지극히 현실적이며 직접적인 소토의 포맷으로 유저들의 피부에 와 닿는 것 같아 흥미롭다. 관념에만 머물던 페리파토스는 마침내 현실의 태(態)로 체화되는 것일까. 우선은 장소가 무슨 사연이나 장애를 지니고 있을지 이에 귀를 기울이는 건 물론 마치 민감한 속살 다루듯 섬세한 눈길로 그 조직을 살피는 작업이 앞섰던 것 같다. 그것이 대지의 형상이든 지형이든 생태 관련 이슈든 이 아카이브에 수록된 작품 어느 것 하나 모종의 치유를 거친 흔적이 결여된 것이 거의 없어 보여서다. 이어서 많은 경우 그의 건축은 앞서 이 글에서 거론한 바 있던 다행의 지향점들이 이제는 체화된 모습으로 예의 조직의 틈 사이마다 이식되는 과정을 증언하고 있는 것 같다. 공간의 내부와 외부 각기에 그것들이 직조해내는 다채로운 흐름의 루트가 생성된다랄까. 특히 그것이 외부라면 기왕에 경계에 도사리고 있던 자연의 실체, 즉 지역 고유의 식생이나 풍경을 잊지 않고 이들을 곧 다시 포섭하겠다는, 일견 긴장이 한껏 풀려 있는 듯한, 방만한(?) 구성으로 남는다. 그 탄력 넘치는 흐름의 양감으로 보아 이 루트는 어떤 지시나 계도가 담긴 순로(guideline)라기 보다 완보(leisurely pace)와 소요로 열린 매우 너그러운 행로로 보아야 옳겠다. 개인적으로 내게도 그 루트는 이미 불어권 작가들 사이에서 종종 신비롭게 취급되곤 하는 이른바 파르쿠르(parcours)의 관념을 특히 연상케 하는 공간적 페리파토스일 것이며, 그 내-외부를 가로지르는 렌더링이기도 하다. 호들갑 떨며 마치 ‘걷고 싶은 길’이란 호칭을 그에게 달아주게 될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 책은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작가 정기용이란 내면 풍경 속 길을 은연중에 미리 답사해볼 기회를 열어놓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가 오랜 시간에 걸쳐 배양해내고 또 무성히 가꾼 정신의 숲속, 아직은 적요함으로 가득 찬 그 프로미나드를. 그러고 보니 내가 이 글을 통해 역시 소요의 관념에 닿아 있다 할 또 하나의 경험으로 그 네 번째 것은 전적으로 현실 속 그와의 동행을 통해 얻어질 터다. 실제로 어떤 행로가 되었든 한번이라도 정기용이란 인물과 함께 길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대 소요학파적 산책을 고스란히 빼닮은 모종의 귀중한 경험을 기억으로 얻게 되는 거다. 더욱이 그걸 이미 알고 있다면 그 경험이 새로이 줄 미지의 풍요로움의 예감으로 자신의 호흡에 미세한 변화가 일던 순간을. 그로부터 건네져오던 묘하도록 풍요로운 정서상의 울림이나 감응 내지는 활기 따위를, 눈앞에 수시로 들어서는 풍경이나 현상을 두고 그가 던지기 시작하는 갖가지 경쾌한 회의나 의문, 때로는 베일에 싸인 그 컨텍스트들을 읽고 끌어내기 시작하는 흥미 가득한 추론이나 억측, 기억, 연상, 상상 등을. 또 오가는 이야기들에 붙어버린 탄성으로 인해 점차 서로의 뇌리 속이 흔연해지던 시간들을. 마치 주인 없는 방 서랍 뒤지듯 우리가 한동안 그의 외면적 산물을 통해서만 숨죽여 몰래 찾아내려 했던 것들, 그의 관념과 사고가 은닉된 원천, 혹은 그 비전의 레퍼런스들, 또 그 배후를 이루고 있을 단서의 편린들, 정작 그것들은 그와 걷던 순간순간의 갈피에 숨 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오늘은 유난히 창틈을 비집는 볕이 좋다.
이번에는 미루지 말고 꼭 그에게 전화를 넣어야겠다.
한번 들르겠노라고.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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