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헌/정재은과 나눈 이야기 >
▷ 젊은 건축가들의 좌담
▶ 정기용 인터뷰, 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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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용 인터뷰, 정재은
2010 11 22 월요일, 일민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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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가 안하시면 택시운전하면 잘했을거라 이야기 하셨잖아요.
왜냐면은 택시운전수는 자기가 가고자 하는 데를 가는게 아니라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가자는 대로 가야하기 때문에. 그거는 내 인생에서 정반대되는. 나는 지금까지 내가 가고자 하는대로 왔지. 근데 택시운전수는 얘길 해보니깐, 첫날이 제일 두렵대. 왜냐하면 택시 끌고 나갔는데 탄 사람이 어디로 가자고 할까봐 가슴이 두근거리고 무섭대요. 그렇죠. 낯선 사람이 어디로 가자, 가야 되잖아요. 그랬을 때의 긴장감. 그런 것도 있고 또 하나는, 자기가 가고 싶지도 않은데 갔을때 낯선 풍경, 도시에서, 그런 걸 좀, 택시 위에다 카메라를 설치해가지고 그걸 다 모으면 기가막힌 책이 될거 같아. 이건 자기 자유를 팔아서 낯선 풍경을 하루 종일 맞이하는 그런 묘한 직업이 택시운전사 같아.
그 다음에 무주 관련 감응의 건축하고 기적의 도서관은 내가 낼려고 그랬어요. 왜그러냐 그렇게 많이 큰 사건들인데 연구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나는 건축가지 저술가가 아닌데. 그래서 좀 뭐 좀 모아서라도 그럴 듯 하게 나와서 제대로 된 문제점들, 사회적 가치, 이런 것들에 대해서 좀 선명하게 연구하는 사람이나 팀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없는거예요. 내가 하는 수 없이 한거죠. 무주 감응의 건축이나 기적의 도서관은 보고서예요, 보고서. 하여튼 그래서 계속 책을 낸 꼴이 됐는데 그게 이제 독자들이 뭐 알아서 판단하든지 하겠죠. 그렇지만 내가 그냥 편집위원회라고 그러지만, 나를 도와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여튼 참여해가지고 책이 나온 거죠. 우리 조교들 뭐 까지 포함해가지고. 6-7명이 달려들어가지고. 5년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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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했던 대중과의 소통. 그 점에서는 어느 부분 성취했다 보는거죠. 이번 전시의 핵심은 정기용의 위대한 건축을 봐라 그게 절대로 아니예요. 두번째로, 건축가의 순수한 작업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건축가가 생각도 하고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그렇게 장기간에 걸쳐서 형성되는 직업이지 그냥 설계하는 제도사가 아니다. 그러니깐 건축이 부동산, 건축가가 부동산 제조기가 아니라 문화 변화에 참여할 수 있는 직업이기도 하다. 그럴려면 시대도 생각하고 사람들도 생각하고 자연도 생각하고 물론 기본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깔고 작업하는 직업이지 공학도가 아니다. 기계적인. 물론 기술도 필요하지만 그거는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건축에서 역사 이래로 건축기술은 그렇게 많이 발달 안했어요. 아직도 집 지을려면 수많은 노동자들이. 자동차는 척척척척 컨베어 벨트로 해서 딱 나오잖아요. 집은 그렇지가 않다. 왜그럴까요. 그거는 기계화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기술은 대단한게 아니다. 거의 원시시대보다 조금 시공기술이 발전한거지, 건축기술이 발전한 건 아니다. 컴퓨터가 다하냐, 그렇지 않다. 사람이 다 입력하는데.
건축이 완성되는 것은 사람과 자연이 완성하는 겁니다. 건축가가 완성하는게 아니라. 그 얘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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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하면, 건축의 궁극적인 목표는 건물이 아니다 이거죠. 사람들 삶이 문제다. 삶이 빠진 건축은 폐허다 이거지. 사진빨 잘 받는 건축, 사람 하나도 없고 근사한, 그건 죽은 건축같아. 냉동된 건축, 그런 느낌이다.
미국으로는 갈 수도 없고, 가고 싶지도 않았어요. 참 이상하죠? >> 네. 참 이상한데요?
그 이유는 첫째, 미국은 돈이 많이 들어요. 거의 천문학적 수준. 1972년도 불란서로 갈 때, 미국 유학비, 등록비 4년, 이거는 어마어마한. 내가 감당할 수도 없고. 두번째, 유럽이 은근히 좋았어.그 얘기는 은근히 미국에 대한 반미감정 이런게 아니고. 6.25때 부터 싫어했어요. 6.25때부터. 왜냐면 미군들이 도와준 것 까진 좋은데, 한국 여자들 데리고 맨날. 그런 약탈자 같은 느낌이 있었어. 그게 서서히 사그라지면서 괜히 미국이 증오심까진 아니지만 유럽보다 내 마음에 안든다. 뭐 그게 제일 크죠. 그래서 가라 그래도 안갔을거야.
물론 그런게 있었을텐데. 그것보다 제가 모시고 있던 선생님이 임영방 선생님이라고 계신데, 그 분이 파리에 오래 계셨거든요. 저희가 대학교 2학년때인가. 서울 미대에 출강하시면서 와 미술을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그 때 정말 감동했어요. 그래서 그 분 조교로 몇년을 있으면서 불란서 문화에 대해서 조금씩 조금씩 터득하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불란서 문화관에서 상영하는 불란서 영화들.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히로시마 내 사랑> 뭐, <위노우 슬롱그 압쌍쓰, une Aussi Longue Absence> 등등. <캐트부린, Lequai des brumes> 부두의 안개, <안개 낀 부두>에서 시작해서 장 뤽 고다르, 마그리트 뒤라스 시나리오 쓴 , 장누네.
수많은 영화에 심취해 있었어. 그게 불란서 문화의 길을 터줬죠. 그 다음에 불어 배우면서 불문학이라고까진 내가 알 건 없지만. 조금 낯간지러운 이야기지만 보들레르 시를 그렇게 좋아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외우고 있고. 말라르메, 그 다음에 초현실주의 작가들. 그 중에서도 그 누구냐 벽을 드나드는 사나이라고 하는, 하여튼 그런 단편영화들, 특히 초현실주의 문학에 대해서 아주 감동 깊었죠. 불란서 가기 전에 그렇게 그냥 낭만적으로 동경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접하면서 느낀 개인의 감정이 거의 감흥했던 것 같애. 감흥. 근데 미국은 뭐. 서부영화 뿐이고. 본 게 없으니깐. 전혀 신비롭지가 않았던 거죠.
>> 선생님 그렇게 유학가셨을 때, 프랑스는 사실은 68년도 이후에 모든 것이 변화하는 시스템이었잖아요.
바로 그것이 저한테는 행운이었습니다.
>> 선생님한테 68혁명 이후에 그 프랑스 파리의 변화, 그런 것이 저는 선생님의, 어쨌든 인생을 많이 지배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럼요. 어쩌면 나는 68혁명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이상하게도 그 68 휴우증, 휴우증이란 뭐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그 속으로 들어간거죠. 68혁명 이전에 불란서 건축 교육은 심각한 보수주의였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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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불란서도 서민들이 대학에 간게 2차대전 후 거든요. 건축과에 들어가면 아버지는 르노 자동차 공장에 도시락 싣고 가고 아들은 건축과에 가서 희랍신전 그리고 그랬었어요. 67년까지도. 입학시험이 그리스 신전 입면 그리는 거예요. 그래서 쭉 보고 저거, 저거 당선. 전후에 불란서를 복구하려고 막 안간힘을 쓰는데, 건축교육은 고전교육을 하고 있는거예요. 68혁명 이후에 그것이 다 산산조각이 나버려요. 그래서 보자르에 있던 건축과가 8개의 대학으로 해체됩니다. 거의 6대학이 그 중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그런 건축대학이고. 선생의 본래 반은 마이스트고 반은 막시스트고. 아마 그랬던 거 같애. 그래서 건축에 관한한 굉장히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과목들이 한 150에서 200개가 설치되어 있었어. 무슨 건축학개론, 구조, 의장론 이런게 아니라 세상의 필요한 모든 것을 질문으로 던진 도시와 노동 이를테면, 문화재 어떻게 할 것이냐, 연극공간과 건축, 건축의 기호론. 뭐 이런 인문 사회 과학과 건축이 접목되서 150에서 200개 과목이 있는거예요. 그 무슨 얘기냐. 반찬이 쫙 깔린 거다. 그걸 자기 기호에 맞춰서. 학생이 자기를 교육시키는 겁니다. 물론 문제도 있었죠. 그치만 나는 듣고 싶은 강의를 다 들은거예요. 그러면서 선생이 가르쳐준 것도 있지만 탐험하는 맛이 있었죠. 만일 67년에 갔으면 큰일 날 뻔 한거죠. 희랍신전 기둥 그리고 있었겠지. 그건 68혁명의 간접적으로 큰 혜택을 받은 사람이 접니다.
창조에 가기로 수락했었던 저의 궁극적인 이유는, 공장설계를 할려고. 공장설계. 한번 했었어요. 그 다음에 무진장 실망해서 때려쳤어요. 그니깐 인테리어 사업본부를 맡으라 해가지고 그걸 했는데 별 인터컨티넨탈 호텔, 쌍둥이빌딩, 큰 프로젝트의 인테리어 설계 담당이었어요. 큰일들이죠. 그것도. 그치만 한계가 있고. 대기업 설계사무소 조직이라는 것이 자율성이 덜 하거든요. 왜냐하면 주인이 대기업이니깐. 그때가 창조는 LG그룹, 옛날 럭키그룹, 지금의 LG그룹이었었죠. 그래서 오히려 (내가)상무이사인데 그때 구자경 회장인가, 그 분의 회장 집을 레노베이션 하러 갔다가 정상무는 머리 좀 짤라이러는거야. 그때 머리가 이렇게 길었거든. 그래서 아이고 이런데서는 오래 일 할 수 없겠다. 그래서 이제 그만 두려고 하는데 직원들이 일종의 친히 쿠테타를 일으킨거야. 아프리카 출장갔을 때 사직서를 제출해가지고 갔다와서 평창동 북한산 자락으로 거의 납치되다시피 한거야. 그래서 창조 졸업한거지.
대형사무실의 일은 그들이 또 해야하는 일이 있죠. 물론 자본에 봉사하는 거지만. 자본주의 사회니깐 또 그런 일이 있어야겠죠. 부정하는 건 아니고. 또 많은 젊은이들 중 능력있는 사람들이 가서 일을 잘하면 좋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좋은 건축가들은 발견하기가 드물어요. 왜냐하면 백명, 이백명, 삼백명, 사백명을 데리고 설계한다는 것은 이거는 사업이거든요. 건축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삼사백명 먹여 살릴려면은 끔찍하죠. 이 사회에 일어나는 모든 편법을 다 똑같이 적용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거든요. 거기서 올바른 건축을 기대한다, 좀 어려운 얘기인거 같다. 그렇지만 봉급은 많이 주니깐. 돈이 필요한 젊은이들은. 그래서 쏠림현상이 있죠. 우리 사무실의 여러 직원들도 다 몇 년있다가 대형사무실로 가고. 뭐 그럴수도 있다 보는거죠.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젊은 건축가들의 큰 한계는 대기업, 아틀리에, 아니면 유학 세 길만 있다, 그렇지 않거든요. 건축가로서의 직업은 수백개가 있어요. 나라에 들어가서 일해도 되고, 건축역사를 해도 되고, 건축평론을 해도 되고. 분야가 내가 손으로 꼽아도 수십개. 그런 다양한 방향을 개척하거나 제시해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거죠. 유학도 전부 또 미국으로 가고 갔다오면 또 적응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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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적응이 안되면 좌절하고. 그런 악순환이 젊은이들, 유학한 사람들 중에 70-80%. 827_0001_04
그런 아주 어려운. 유학은 만능이 아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우선 자신을 알고 이 나라를 알고 다시 돌아올거면. 안돌아올거면 뭐 그럴 필요도 없고.
물론 잘 아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미국의 특히 도시계획 공부는, 교육은 우리나라하고 상황이 다르거든요. 훨씬 기능주의적이고 커다란 땅덩어리에서 하는 도시계획하고 좁아터진 한국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거든. 땅이 다르고 제도가 다르고. 헌데 미국것 가져다가 여기 이식한다고 성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백화점도 에스컬레이터 놓이는 위치가 미국하고 달라요. 우리나라 사람은 들어가자마자 올라가야돼. 그러면 일층이 장사가 안되잖아요. 다 위로 가니깐. 그래도 그렇게 해야돼. 사는 방식이 다르고 그 다음에 자동차에 대한 이동수단에 대한 감각이 다르고 집에 대한 감각이 다르고 하기 때문에 미국교육은 한국하고 맞지가 않다. 대체로. 그래서 열명이 미국유학가면 한 사람이 제대로 공부할까 그렇다.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미국에서 일하는게 좋아요. 한국에 올 필요가 없어. 난 그렇게 생각을 해요. 특히 도시계획하는 사람들은 많은 실패를 남겼어요. 서울에. 그러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어요. 한국을 저주하면서. 그럴 필요가 없거든요. 너무나 다른데. 양재동이 실패작 중에 하나야. 차가 못나가게 되어있어. 성으로 만들었어. 딱 몇군데 들어오는데만. 자동차가 많지 않다 이렇게 생각했어. 오해가 많죠.
물론 미국에도 좋은 교육자들이 있고 그렇지만, 이상하게 한국학생들이 미국에 가서 내가 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공부를 하고 나머지는 전부 교수가 됐잖아요. 실무를 하지 않고. 박사학위 따가지고 다 교수하잖아. 그게 문제죠.
>> 오랫동안 교육에 힘을 써오셨는데, 선생님께서 학교에 정식교수는 아니지만 건축가로써 일하시면서 학생들을 가르치셨잖아요.
거의 25년 가르쳤죠.
>> 건축가에게 학생을 가르친다는 건 뭘까요?
그거는 자기발견입니다. 얘들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가르치면서 문제를 공유하는거죠. 다시 말씀드리면 건축가는 늘 공부를 해야되요. 공부를. 학생들을 통해서 무엇이 문제인지 생각하게 되고 그 답을 찾게 되고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교육을 통해서 자기도 공부하고 학생들도 지도하고. 그러니깐 학생들은 배워야하잖아요. 그러면 선생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 또 생각해야 되잖아요. 그것이 지속될 때 건축가도 늘 새로운 생각으로 잘 쓸 수가 있어요. 그래서 대다수의 건축 실무자들은 학교에 나갑니다. 머리를 fresh하게 하기 위해서.
>> 선생님이 생각할 때 좋은 선생님은 공부를 계속하는 선생님?
계속 생각하고 탐색하고 질문을 던지고. 그것도 아주 근원적인 질문. 똑같은 질문을 25년 동안 할 수도 있어요. 집이란 무엇이냐, 삶이란 무엇이냐, 창이란 무엇이냐, 빛이란 무엇이냐. 똑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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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계속 할 수도 있어요. 거기서 지속되는 답이 있고 새롭게 발견되는 답이 있고. 그래서 건축가는 지속적으로 근원적 질문을 던져야되요. 그리고 나머지는 역사와 시대에 대해서 늘 공부해야되고. 나는 그건 정상적인 일이라고 보는거죠.
서울미대 졸업하고 1년 딱 직장생활했어요. 그때 내가 결심을 한게 하나가 있어요. 난 절대로 매어 살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내가 나다. 내가 나를 고용한다 이렇게. 그래서 어디 이렇게 소속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많았어요. 그것은 68년부터 그래. 직장생활 1년에 맨날 불려다녀. 지각 최대로 많이 한 사람 명단 7명, 정기용 1등, 탑이거든. 하여튼 직장생활하고는 신체는 말을 안들어 버리니깐 거부. 그래 하고 싶은대로 하자. 그래서 교수가 되자 않은 건 고용되는게 싫어서. 강사나 겸임교수는 언제나 쫓아내도 좋고 내가 나가도 되고. 그런 이기적이고 자유로움을 쟁취하기 위한 이기적 생각 때문에 그렇죠.
>> 많은 수업과목 중에 제가 인상적으로 선생님 하고자 했던 수업 중에 제일 좋아던 거는 '건축과 윤리'라는 수업을 준비하셨던 걸로 알고 있어요. 어떤 것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생각하셨어요?
세가지인데, 하나는 직업상의 윤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얘기냐. 건축가는 타인의 삶을 다루거든요. 의사, 히포크라테스 선서합니다. 나는 의사로서 인간을 존중하고. 왜 선서를 할까요. 그만큼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신성한 직업임을 사회와 개인이 공유하는거거든요. 그래서 의사는 사람만 고치는게 아니라 정직한 사람 이렇게 대체로 되있죠. 건축가도 의사 못지 않게 사람들의 삶을 다루는데 선서를 안해요. 장사꾼 아니 무슨 공학도 그 수준으로 생각하는거야. 사회도 그렇고 건축가들도 그렇고. 그래서 건축가에게 첫번째 덕목은 윤리의식이다. 두번째, 건축가는 그 누구보다도 사회적 돈을 쓰는 사람입니다. 설계비는 얼마 안되지만 어떤 해는 내가 천억을 쓴 적도 있거든요.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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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린 것이 사회적 돈이 천억이 나가는데. 삼성 이건희 회장이 개인이 천억 써요? 못써요. 일년동안. 건축가는 그리는대로 돈을 세상이 지불해야된다. 엄청난 일이죠, 사실. 사회적 돈을 그만큼 쓰는 직업은 사기꾼 빼고는 없거든요. 그래서 건축가는 사실은 건축주가 시공비를 대는 것이지만 건축가가 명령하는거거든요. 무슨 이유로, 어떤 근거로. 건축가이기 때문에. 이게 말이 잘 안되는거죠. 거기에 건축가가 큰 윤리적 책임을 지어야 된다. 세번째, 게다가 건축가는 어떤 직업보다도 물질을 물 쓰듯 하는 직업이다. 철골, 뭐 시멘트, 유리, 뭐 해가지고 3천평 집을 지으면 뭐 이건 막대한 양이야. 땅을 다 파내고 뭐. 그 양을 생각하면 잠이 안오는거죠. 왜. 건축가의 지구와의 관계에서 보면은 건축가는 집을 지으면 그 땅을 불모지로 만드는거란 말야. 불모지로. 집이 없으면 나무도 자라고 곡식도 자라고. 도시가 확장되면서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모든 농토가 건축물로 뒤덮였죠. 강남이 다 그렇게 된거죠. 불모지를 만든거죠. 그 세번째 이유는 지구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된다. 더 직설적으로 얘기하면 땅에 대한 예의. 사실은 땅을 살인하는 사람이거든요. 윤리적으로 삶을 다루고 사회적 돈을 다루고 물질을 다루는 사람이 책임을 져야 되잖아. 그런 교육이 없어요
나는 그게 건축과 1학년때 배워야 된다 보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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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제일 인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선생님 그런 여러가지 활동 중에서, 근현대사 역사에 대한 연구와 어떤 활동을 굉장히 많이 하신거가 제가 볼 때는 다른 건축가에 비해서 찾아볼 수 없는 활동들이었던 것 같아요.
그거는 저한테 운명같은거 같아요. 머릿속으로 생각하기 전에 운명적으로 찾아온 일들이다. 왜냐하면 제가 1945년에 태어났거든요. 해방되기 열흘전에. 제가 태어나고 이틀 있다가 히로시마에서 원자탄이 터졌어요. 45년 8월에 해방되고 열흘있다가. 그 다음에 미군정이 시작되고. 조금있다가 6.25가 터지고 우리 아버지가 납치당해서 지금까지도 생사를 모르고. 그래서 우리 어머님은 스물넷에 과부가 되가지고 지금 이날까지 혼자 사시고. 중학교 들어가서 좀 공부를 할려고 그러는데 4.19가 터지고 419때는 우리 경기학교에서 청와대가 보이거든요. 소방차가 들락거리고 밤에는 총소리가 막 나고. 골목으로 골목으로 해서 집으로 돌아오고. 그 일년있으니깐 또 군인들이 썬그라스 쓰고 딱 와서 군사정권이 생기고. 그 바람에 64년 무렵에는 일년 내내 데모하고. 한일회담 반대 데모. 64, 65, 66 계속 학교는 임시휴교. 그렇지 않으면 일찍 휴교한. 군인들이 탱크를 가지고 교정에 침입하고 진지를 구축하고. 그런 난세를 지나서 유신이 선포되던 날, 1972년 11월 15일 한국땅을 떠나는거지. 유신이 선포되고. 그러고 잠시 일시 귀국했을 때, 5년 후에 서울의 봄 해가지고 이제 막 정치인들이 새로운 기운을 느끼고 일어나려고 그러는데 또 전두환이 나타났다. 그랬더니 뭐 군인들이 의형제를 맺었다나 전두환이 사라지니깐 또 노태우가 나와, 대통령 나와. 그러니깐 다음에 김영삼 정권이 반대파하고 손을 잡고 나오고 그러던 어느날 호남 대통령 생겼다, 빨갱이가 대통령이 됐다, IMF가 왔다 이래가지고 또 진통을 겪고 그리고 이름 석자도 모르는 노무현 대통령이 또 나오고. 지금의 정권까지, 이명박 정권까지 한국의 근현대사를 기억으로가 아니라 몸으로 부딪혀서 살았기 때문에 그것을 떠날 수가 없는거죠.
그 중에서 이제 제일 중요한 사건들이 몇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도대체 국가가 무엇이냐, 국가라는게 도대체 어떻게 존재하길래 이땅이 이렇게 요란스럽냐, 두번째 주변 강대국들에 대한 생각들이 1970년대 후반부터 이영희씨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으면서 에? 우리 우방인지 알았더니 지네들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전부다 일하는구나. 그러면서 세상을 뒤집어 보기 시작하는거죠. 중국도 마찬가지고. 일본도 마찬가지고. 그러면 국가와 정체성의 문제, 한국인이면 다 고민하죠. 근데 이제 공부를 하기 시작하는겁니다. 책들을 통하여서. 논문들을 통해서. 그 다음에 두번째 문제, 두번째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우리 큰이모예요, 큰이모. 큰이모가 어느날 밤에 들려주는 얘기가 딸과 시아버지가 6.25때 끌려가서 죽었대요. 드르륵. 왜. 남편이 부역했다고. 청주교도소에 있는 이유 하나만으로 할아버지를 갖다가 드르륵. 그 시신을 찾으려니깐 딸은 안나오는 거예요. 시아버지를 찾았는데 시체 구덩이 속에서 못찾겠다. 근데 우리 이모가 솔기를 마무리하는 자기만의 방법이 있대요. 그래서 시체들의 소매 솔기를 다 뒤집어보고 찾아낸거야. 그런데 머리가 없어요. 그니깐 드르륵 드르륵 하면서 박살이나 날아간거죠. 아이고. 젊은 이모가 스물여섯살때인가. 시신을 지게로 지고 와서 장례를 지냈다. 그날 저녁에 꿈을 꾸는데 악몽, 시아버지가 나타나서 얘 아가 고생했다. 근데 내가 숨을 쉴 수가 없구나. 퍼떡 깨서 보니깐 머리가 없으니깐. 그 다음날 다시 구덩이에 갔대. 머리 찾으러. 아무리 찾아도 안나와. 그 시신 수습하는 근처 흙을 머리를 싸매서, 보자기를 가져갔다가, 머리같이 흙으로 만들어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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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들고 다시 관을 열고 거기다 머리를 가서 놨대. 그날 저녁에 꿈에 또 시아버지가 나타나서 정말 수고했다, 이제 좀 마음 놓고 숨을 쉴 수가 있구나. 그 이야기를 듣고 아 이게 이모님댁의 비극만이 아니다. 6.25때 사라진 수백만의 민초들, 이유도 없이, 그렇게해서 따지고 따지고 보니 48년 제주도 43사건에서부터 수많은 민초들이 이유도 없이,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은거야. 그래서 학살에 대한 공부를 시작을 한거지. 특히 제주 43사건은 학살에 대한 기록이 많기 때문에. 백조일손지묘라고 무슬포 옆에 조그만 마을에 사람들을 예비검속이라고 그래가지고 625가 나자마자 너, 너, 너, 너 해가지고 드르륵. 그러고서는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려고 그러는데 어디서 죽였는지 가르쳐주지를 않는거야. 거의 3년동안. 이런 극악무도한 일이 어디있는가. 그 3년 후에 가서 땅을 파보니깐 누가 아버지인지 할아버지인지 구분도 못하고 뼈만 산더미 같이. 그 후손들이 뼈를 대충 나눠가지고 보니깐 백열몇명인데, 백개의 봉분이 생긴거죠. 그 마을사람들의 제삿날 같은거야. 그래서 후손들이 묘비에다가, 조상은 백명이지만 자손은 하나다. 그래서 백조일손지묘를 썼습니다. 지금도 무슬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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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알뜰비행장 옆에 있죠. 묘비에 이렇게 써있어요. 그 시를 보고서 막 엉엉 울었죠. 제주도는 가난한 땅이거든요. 쌀농사를 못져요. 물이 다 스며들어가지고. 보리 간신히. 보리를 쪄가지고 소쿠리에 넣으면 식은거를 뜯어서 생선조림, 촐래라고는 것에 찍어서, 푸성귀하고. 그래서 식회 이런게 나옵니다. 가난해도 식은 밥 나눠먹던 우리들, 그런 표현이 나와요. 억울하게 죽은 무덤에는 붉은 꽃이 피더이다, 대정산 자락에서. 막 눈물이. 좋은 시는 아닌데 막 가슴이 막.
제주 4.3평화공원이 제주도에 지어졌거든요. 그때 응모했다가 낙방했거든요. 6.25 50주년 기념관, 그것도 세계학살진상규명위원회를 제안하는 거였었거든요. 그것도 낙방했거든요. 부산 민주화 공원, 그것도 낙방했거든요. 그 주제들이 전부다 죽음, 학살 그런 공간들이 다 기념관이거든요. 당연히 건축가가 마땅히 다뤄야 한다고 난 생각을 하는거죠.
저는 거의 확신을 가지고 얘기할 수 있는게 제주 4.3사건때부터 죽은 사람은 많은데 책임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한두명 죽이면 살인자, 열댓명 죽으면 사고사건, 천명 만명 죽으면 전쟁. 그때 한국에서 일어났던 6.25전쟁도 그렇고 민주화투쟁도 그렇고 4.3사건도 그렇고 6.25 빼놓으면 내전의 일종이야, 내전. 그런데 광주 학살사건도 그렇고 죽어서 매장을 했는데 죽인 놈이 없어. 니가 죽였지, 제가 쏘라고 그랬다. 니가 쏘라고 그랬냐, 제가 쏘라고 그랬다. 아직까지도 책임을 않지고 골프치러 다니고.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재산이 29만원 뿐이 없다고 그러고. 그러니깐 무슨 얘기냐. 죽음을 책임지지 않는 사회는 삶만 남는거거든, 사는 것만. 그니깐 이 사회가 사는 것이라면 물, 불 가리지 않는다. 천민자본주의 길로 접어든 것이 죽음보다 더 소중한 것은 돈이다. 아들이 사기를 치고 아버지가 살인을 해도 그래도 우리 새끼, 우리 가족. 어떻게보면 임진년때부터 우리는 살아남아야 된다. 옆집은 모르겠다. 그런 것이 은연 중에 자라나서 죽음을 사회에서 축출해버렸다. 옛날은, 유럽은 지금도 마찬가지고 산자와 죽은자가 같이 살아요. 같은 도시에서. 근데 지금은 집에서 죽어도 병원으로 보내고 병원에서 화장터로 보내고 가져다 뿌려버리고. 죽음에 대한 대접도 그렇고 죽음에 대한 생각도 그렇고. 상조회사들 전부 사기쳐가지고 다 검찰에 불려가고. 죽음에 대한 사람은 살아남고 죽음은 이 사회에서 사라져버렸다.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다. 한 사회에서. 또다른 출발이다. 그래서 죽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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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시하고 그러진 않아도 죽음에 대한 대접을 제대로 할 때, 한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두 죽는데 살아있는 사람이 다 세상을 떠나게 되어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종교가 아니더라도 어떤 사회적 일치된 윤리의식이 있어야 되지 않냐. 근데 수많은 사람이 이땅에서 이유도 모르고 죽었는데 사죄하는 사람이 없고 무당이 가져온 해원굿이나 하고 그게 전부다. 제가 보기에는 한국사회는 정말로 죽음을 죽인 사회이기 때문에 그 댓가를 지불할 것이다라고 보는거죠. 죽음을 살인했기 때문에 엄청난 살인죄가 있다. 저는 감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이 터닝포인트다, 터닝포인트. 이제는 돈은 다 벌어봤으니깐 이제 어떻게 살것인지 좀, 조금이라도 고민을 해야되겠다. 이웃도 쳐다보고 더불어 함께 살 수 있는 그래도 그때가 좋지 않았느냐.
5살때 리어카에 늙은 시신을 끌고 가는 수레를 쫒아 간 적이 있어요, 5살때. 시신은 가마니로 덮었어요. 머리가 살짝 보이고 발가락이 이렇게 보이고 덜컹하면은 사타구니도 보이고. 그 때 충격을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가마니를 덮은 시신을 본 적이 있어요. 리어카로 끌고 가는.
>> 전쟁때..
한국전쟁때. 그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 죽음이라기 보다 아우 어떻게 사람이 저런 꼴이 될 수가 있나. 이거 죽은 것이 참 비루하고 빈약하고 연약하고 비극적이고 막 그런 어렸을 때 그런 생각. 리어카를 끌고 가는 사람은 아무런 생각도 없는 것 같아. 한참을 쫒아 갔었어요. 그때 기억이 나고. 6.25때 폭격이 나고 나면은 환자들이 밀려드는거야. 방이 뭐 넘쳐나가지고 마당에다 가마니깔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막 신음소리 나고 나 죽어요 뭐이래 가지고. 또 죽어 나가면은 막 싸우고 막 그런 아비규환. 우리 한옥 마당에서 벌어진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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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적이 있고. 그 너무 실제적이고 직접적으로 죽음을 대한 거고. 그 다음에 이제 또다른 죽음은 큰아버지가 큰집이 되가지고 어려서부터 계속 제사에 참여했어요. 그 제사라는 아주 엄숙한 순간. 제사상에다가 수저를 놓고 잠깐 후퇴합니다. 조상들이 밥먹는다고. 그때의 느낌. 아 할아버지들이 다 오시는구나. 그때 큰아버지가 그렇게 근사할 수가 없어요. 축문 읽을 때 '유 세차..' 이러면서 눈물이 나는거야. 그래서 맨날 할아버지 할머니하고 만났죠. 그렇게 교육을 받았고. 제삿날이라는게 형식적인게 아니라 정말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집에 방문한 것처럼 대접해주고 이런. 그게 몸에 배었죠. 어떻게 보면 큰아버님한테 배운 것은 제사를 통한 죽음에 대한 대접이라고 할까 뭐 그런 것일지도.
저한테 관심있는 것 중에 하나는 건축의 죽음이예요. 사실은. 그것도 깨끗한 죽음. 그래서 흙건축에 대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거야. 흙집은 부러지면 그냥 그 자리에 흙이 되요. 쓰레기차로 내갈 필요가 없어. 흙건축을 연구할 때 그런 광경을 많이 목격했어요. 흙집 때려부술 때, 나무 몇개 줄여서 불때서 사라지고 흙은 그냥 바닥에 그냥 다져서 흙으로 돌아가는거야. 그게 지구를 생각하는 건축이다, 나 그렇게 생각한거죠.
우리 아버지 장면도 다섯가지를 기억하고 있어요. 하나는 두세살 때 강을 지날 때. 세살이면 아장아장 걷잖아요. 아버지가 업다가 내려놓고 걸으라고 해서 가는데 길은 좁고 낭떠러지 퍼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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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있어가지고. 아버지가 뒤돌아보니까 기용아 빨리와라. 그때의 구원같은게 있어요. 무서워서 벌벌 떠는거 보고 아버지가 손을 잡아주고. 두번째 장면은 6.25때. 하늘에서 맨날 불비가 와요, 불비가. 하늘이 빨개 항상. 그래서 전부 화재날까봐 지붕에다 물을 끼언는거야. 그 파편이 날아올까봐 이불을 뒤집어 쓰고 머리도 보호하고 사다리 놓고 물을 지붕에도 쫙쫙 뿌리는데 아버지가 이렇게 올려다보니깐 지붕에다 물을 뿌리는거 기억나. 그 다음에 삐용 와다다다 하면은 전부 등화관제라고 그래서 불이 빛이 안 새어 나가게 한옥문 덧문을 쫙쫙 닫는거야. 고거. 그 다음에 아버지 납치되던 날 내가 양말 신고 있었는데 누가 못 부르니깐 나갔어요. 그때 안나가야 되는데. 그러고 안돌아오신거죠. 그 다음에 마지막 장면이 그렇게 납치된 사람들을 초등학교에다 이렇게 모아놨어요. 그때 우리 큰어머니가 소화제 같은 걸 가져가가지고 배탈났다고 나오라고. 그랬더니 괜찮다고 몇일있으면 전쟁이 끝난다고. 그 장면이 생각나요. 다 충격적인 사건들이죠. 그래서 몇 장면은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어요. 그 다음에 조금 혼란스러운 장면이 있으면 T자 가지고 다니던거 뭐.
참 신비한 일인데 초등학교 3학년때까지 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했어요. 큰집에 살면서 이불 뒤집어쓰고 울고. 기억이 역력해요. 그걸 뭘로 달랬느냐. 학교갔다오면 집에다 가방놓고 무조건 나가는거야. 을지로 6가 로타리, 거기 계림극장이라고 있었어요. 가끔 악극도 하고 임춘앵 뭐 악극단, 영화도 하고 그래가지고 항상 스틸사진이 붙어있어요. 스틸사진에 가서 십분쯤 훑고 거기를 다섯바퀴, 열바퀴를 돌았대. 나는 몰랐는데 큰아버지, 큰어머니가 이상하다해서 쫓아나왔대요. 근데 아무일 없고 계속 뱅글뱅글 돌고. 들어가서 울고. 그때도 위안을 줬던 건 영화 스틸사진이었던 것 같아요. 3학년때 졸업했어. 그 다음엔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운 적이 없어요. 다만 큰아버지 단체기합 줄 때, 다 종아리 때리면서 나만 안때렸어요. 나중에 보니깐 내가 아버지하고 똑같이 생겼대. 회초리 들다가 아이고 내동생을 어떻게 때리냐. 너 나와. 그때 내가 아 큰아버지시구나. 그렇게 느낀적이 있어요. 그렇다고 막 울고 그러지 않았어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초등학교 3학년때 졸업해버렸어요. 그러니깐 아버지 떠나시고 한 4-5년 만에 극복한거야.
>> 선생님이 외가의 집을 파리에서 학위논문으로 외갓집에 대한 연구를 쓰셨잖아요. 선생님한테는 아무래도 한국적인 집에 대한 기억이 외갓집에 대한 이미지였을 것 같아요.
그건 나도 이유도 모르겠는데 엄청난 애정을 가지고 있는거 같애. 그건 초등학교 4-5학년때 외갓집에 겨울방학엔가 갔다가 어디서 멀리서 '어흐 어아 이제가면 언제오나 딸랑 딸랑 딸랑' 강변 절벽 모퉁이로 상여가 지나가는거예요. 아지랑이가 막 피는데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 여기가 천국인데 저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이런 상여꾼의 소리가 계곡으로 들어가면 서서히 페이드 아웃, 다시 돌아나오는 '어어 어엉' 먼 거린데 강변에 쩌렁쩌렁 울리는 그 소리가 외갓집 마루에서 들리는거야. 그걸 이렇게 바라보면서 어 여기가 천국이다. 그런게 있고. 그 다음에 외갓집에서 누님들이 많은데 나를 그렇게 귀여워해주고 그러기도하고. 이상하게 외갓집에만 가면 항상 사건들이 평화롭게 진행이 되는거야. 아픈 사람은 경을 읽었어요, 그때. 방울소리를 다다다다닥 하면서. 요새 뭐 마야나 아프리카에서 보는거랑 똑같은거야. 침침한 방에서 애는 누워있고 막 경을 읽고. 아침에 가보면 길목마다 음식들이 떨어져있고. 아주 낯선 풍경들이.
그런 저런 모든 것이 가난이라기보다 나는 오히려 노동에 참여 안해서 모르지. 어렸으니깐. 천국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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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이 큰집에서 병원, 뭐 그런 이미지 이런것과 그 다음에 외갓집에서의 그런 기억과 체험이 굉장히 상반된 느낌으로 공존하는 것 같아요.
상반됐어. 그래서 그 농촌의 원형, 그런 따뜻한 감정이 불란서 유학하고 5년있다 돌아왔을 때 잠깐 어머니 편찮으시다고 해서 그때 그것이 산산조각이 나버렸어요. 새마을운동에 의해서 지붕들 다 해체하고 마을에다가 길 빵빵 뚫고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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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들을 이러면서, 연립주택까지 막 갔다놓고 막 기절하겠더라고요, 기절. 거기 엄청난 적개심, 반발심, 나의 천국을 해체하는 힘들에 대한 저항, 그걸 해야겠다. 그래서 한국 건축가들은 뭘하고 있나 보니깐 건설부 농촌표준주택 그래가지고 꽁지 빠진 새같이 농촌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이 막 분노하겠더라고. 그래서 농민들은 맨날 개량의 대상이 되는. 교육시켜야 되고 뭐. 하여튼 여러가지로 참을 수가 없어서 파리에 돌아가서 논문의 주제를 바꾼 겁니다. 농촌은 변할 수 뿐은 없다. 그치만 앞으로 한국 농촌은 기업농이 인제 성행할 것이다. 그런 자본에 대응한 협동조합 같은 농촌의 구조를 만들어야 겠다. 그러면서 옛날 건축의 좋은 점들, 한국땅의 경사면들을 활용해서 만들어야 겠다. 그래서 그걸 논문으로 만든거죠. 그러면서 불란서에서 공부해서 현대건축만 배울 일이 아니라 한국건축을 제대로 공부하자, 그런 계기로 삼은거죠.
>> 큰댁의 큰아버지하고, 그 다음에 외삼촌댁의 외삼촌, 각세도의 외삼촌.. 각세도, 교주같으신 분.
>> 외삼촌도 선생님한테 많은 영향력을 미치신 것 같아요. 어린시절 정신형성기에
외갓집에 가면 남자들은 다 독상이거든요. 여자들은 한군데 모여 먹고. 근데 독상, 겸상의 반대편의 제가 있는거예요. 어려서부터 그렇게 대접을. 그러면서 각세도는 불교, 도교, 그 다음에 유교 이런걸 혼합한 민간신앙이거든요. 그래서 늘 읊는 구절이 있어요. 원각천지 무궁조화 해탈사멸 영귀영계 그런 구절들이라던지. 외삼촌은 늘 다락에 올라가서 외할머니한테 어디갔다오겠습니다 고하고 갔다오고, 또 오셔서는 또. 처음으로 방앗간도 만드시고 그러면서 시간이 없으니깐 달밤에 농사를 짓는거야. 그러면 거의 24시간 노동을 하시는거거든. 생각하고 공부하고. 조금 성인 스타일.
큰집의 큰아버지는 엄격하시고 지붕 있고 밥먹는데 왜 공부를 못하는가 그건 있을 수 없다. 고학해가지고 의사면허를 땄기 때문에 배추장사, 땅콩장사, 냉방에서 겨울을 보내고 그런 의지의 사나이.
>> 각세도의 뜻은 뭐죠?
세상은 깨닫는 길. 어떻게보면 소크라테스 같은 거지. 너 자신을 알아라. 그럴려면 이러 이러한 것을 알아야만 된다. 그러니깐 제목이 근사한거죠. 기독교, 뭐 불교 그런 것 보다는 훨씬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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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들의 생활에 접근한. 각 도교, 불교, 유교에서 좋은 점을 발췌해서 이렇게 현실적으로 실천에 맞도록 재구성한 교가 각세도야.
>> 저는 선생님이 성인이 되서 프랑스 유학가서 많은 건축을 공부하고 이런 것도 있지만 진짜 이런 각세도의 외삼촌과 의사로서 헌신하신 큰아버지, 이런 어떤 두 사람으로부터 배운 여러가지 그런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어요.
아마 나의 베이직한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겠죠. 아마 그럴거야. 그걸 중심에 놓고 나의 행동을 이렇게 점검하는 이런. 특히 우리 외삼촌은 세계종교통일에 대해서 아주 몸으로 실천한 그런 분입니다. 평화를 위해서는 종교통합이 있어야 된다. 그런 신념에 가득한.
건축문화건축기술선진화위원회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과학기술비서관이 순천 기적의 도서관 건설위원장이었었어. 지금 이름이 금방 안떠오르는데. 그분이 불러서. 아니 허순영 관장말고. 건설위원장 따로. 순천대학 교수였어. 생명공학인가. 그래서 청와대 갔더니 그런 일을 구상하고 있다. 대통령께서 지시하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여기저기 다니면서 우리나라가 건축문화가 너무 좀 후진 것 같다 뭐 이런 생각이 드신 것 같애. 그래서 건축의 품격을 좀 높이는 정책을 좀 수립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보고서를 내고 그걸 근거로 해서 대통령 결제가 떨어지고 해가지고 인원 구성을 했죠. 저도 좀 자문을 하고. 그래서 그때 초대위원장이 김 누구야 김진애 박사가 됐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거기서 끝날 쯤 되가지고 노무현 대통령 집을, 사저를 설계하게 된거죠. 거의 조금 차이를 두고. 그러면서 굉장히 활동적으로 움직일 수 뿐이 없었죠. 지금은 이제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그때 노무현 대통령에게 설계비 말고 부탁한게 딱 한가지 있어. 사천만 인구에 정부 관속 공사 속에 건축담당 공무원이 한사람, 두사람 뿐이 건설교통부에 있다. 말이 안된다. 이거 어쩜 이럴 수가 있냐. 수많은 공공건축들이 발주되는 과정에서 그걸 쫙 부서들이 알아서 말이 안된다. 건축문화를 향상시킬려면 연구소가 있어야 된다. 연구소 하나만 좀. 그래서 천신만고 끝에 국토개발연구원에 건축도시공간연구소가 만들어졌죠. 그 노무현 대통령께서 내가 임기 중에 꼭 하겠습니다, 약속을 지키셨어요. 그래서 선진화위원회의 임무가 끝나고도 지속적으로 국가정책을 건축정책을 보좌할 수 있는 연구기관이 좀 5년정도 노력해서 정책에 또 이를 반영하고 그럴 필요가 있다. 그래서 연구소가 만들어졌죠. 그거를 들어주신 것만해도 잘 발전해야되는데 모르겠어요, 요샌 어떻게 되고 있는지.
>> 하나의 국가에서 건축이 무엇이냐고 생각하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렇죠. 그래서 건축기본법도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김진애 박사가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간신히 만들어놨죠. 그래서 지금 국가건축정책위원회가 대통령 직속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그 전임 정권의 한일을 다 무시했는데 그거는 살려놨더라고요.
>> 그래서 어쨌든 기본계획이 나오기는 했겠죠. 선생님이 생각하실 때, 한국에서 한국이라는 국가에서 정부에서 건축이라는 개념을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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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고 한다면 선생님 뭐라 정의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건축은 종합적인 그 한시대에 어떤 종합적인 작업으로써 그 나라의 문화와 그 나라의 삶의 질적인 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죠. 그니깐 삶과 문화를 동시에 질적으로 증진시킬 수 있는 그릇이다. 또한 나아가서는 이제 건축은 건축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국가나 사회도 간섭하고 공동의 노력을 필요로하는 대상이다. 왜냐, 전 국민의 삶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죠.
>> 선생님은 오랜 시간 동안 하시던 공공건축에 대해서 경험을 하셨는데요. 실제로 많은 일도 하시고요. 일단은 선생님이 생각하는 공공성은 무엇인가요.
공공성이란 공공이 발주해서 공공성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그게 공공성이잖아.
서울을 좀 이렇게 주무를 수 있다면 적어도 사대문안 두가지를 하고 싶어요. 높이를 좀 조절해야겠다. 서울이 수용할 수 있는 수직적 높이가 한 20층인것 같아요. 많아야 24-25층. 30층 뭐 그건 너무 높아서. 북악산에 가서 보면 그 선이 나와있어요. 그대로만 하면 될거 같아요. 용납할 수 있는 수직적 한계. 두번째, 그럴려면 전시민이 성곽 주위를 돌면서 서울을 바라볼 수 있어야 돼. 그래서 성곽을 완벽하게 돌 수 있는 코스를 만드는게 중요하다. 그러면서 성곽을 복원하고 그래서 역사도시로 다시 만들어야 되겠다. 그게 내가 원하는 바죠. 그 다음에 두번째로(사실은 세번째), 광화문에서 남대문까지 대기업의 사무실이 아니라 문화의 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미국대사관이 빠져나가고 중앙도서관이 그쪽으로 오고, 문화부가 빠져나가고 새로운 서울포럼 같은 이런 정보센터와 같은 것이 생기고. 외무부 종합청사가 빠져나가고 세종문화회관이 삼천석인데 그걸 다 채워 맨날 공연을 할 수가 없어요. 적자예요. 그 세종문화회관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제일 바라는게 천석 규모의 소극장이 두세개가 딸린 겁니다. 그거를 증축해주고. 그래서 광화문을 보고 왼쪽은 공연공간, 오른쪽은 지식의 공간 이렇게 좀. 정보통신부도 좀 나가버리고 좀. 정치의 거리에서 역사의 거리로. 광장도 다시 좀 손을 보고. 문화의 거리로 만들 필요가 있겠다. 그래야 이땅이 좀 숨을 쉴 수 있지 않겠느냐.
>> 선생님이 생각하는 서울의 랜드마크, 서울이라는 도시의 랜드마크가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그건 글에도 많이 썼는데, 서울의 랜드마크는 자연입니다. 한강과 산들, 남산, 인왕상, 뭐 북악산, 그 다음에 아차산. 그 다음에 인제..
>> 인간이 만든 것 중에 고르시라면?
없어요. 그 뭐 사람들이 자꾸 남대문 뭐 이런거 하는데 서울은, 서울의 상징은 물건이 아니예요. 원래 서울을 만들때 조선왕조의 의지는 예의 도시를 만드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숭례문은 예를 숭상하는 문이다. 그래서 이 도시는, 도시의 상징은 예라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뭐 남대문이 상징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런 물질적인 것이 아닌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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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까 서울에 대한 어떤, 사대문 안의 바램의 대해서 말했잖아요. 선생님이 서울에 대해서 미래를 직관적으로 떠올린다면 어떤 이미지의 도시의 이미지가 떠오르세요?
미래라고는 하지만 30-40년 후도 지금 보는 것하고 비슷할거예요. 그렇게 크게 달라지지 않을거예요. 그니깐 미래가 지금 와있어요. 오는게 아니라. 다만 이제 아파트들이 사라지겠죠. 왜. 인구가 감소하기 때문에. 그리고 큰 평은 관리비가 어렵기 때문에 이제 전부다 소형으로 해서 이렇게 이제서야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될지 알게 될 것이다, 십년 안으로. 그래서 다 시골에 별장들을 두고 이제 이렇게 극악무도하게 아파트만 짓고 살지 않을 것이다. 왜. 직접적으로 금전적 손해가 오기 때문에. 그래서 조금만 정책을 잘못하면은 유령의 도시가 될 수도 있다, 그래 보는거죠. 그래서 인제 30-40년 후는 아파트를 때려부수는 일을 할것이다. 틀림없다. 그 쓰레기 버릴 준비나 지금하는게 좋겠다.
그거는 변수가 너무 많아가지고 한국이 정말로 진정한 민주사회로 갈것이냐 아니냐 그건 지금 정치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전부다 세대교체가 일어나서 민주화에 대한 새로운 정의도 필요하고 진보사회에 대한 새로운 정의도 필요하고 이제는 해방이후에 1차세대는 물러날 때가 됐다. 지금은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 머리를 교체해야 돼.
>> 갑자기 선생님 얘기를 듣다보니깐, 그 아파트 쓰레기들은 진짜 다 어디다 버리죠? 나중에? 매립하겠죠, 매립.
>> 아 매립. 그게 또.. 심각한 문제죠.
>> 도시의 또다른 그런..
도시는 쓰레기예요.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아니면 폐허를 즐기던지 뭐. 폐허공원 뭐 이런거 만들던지 또. 아이디어가 있겠지. 다 때려부수고 쓰레기통으로 가야하는데 쓰레기통이 만원이다. 그러면 감상해야지. 아파트 폐허의 공원, 국립공원 이런것도 세울 수 있겠죠.
>> 선생님이 어쨌든 한국을 망치고 두가지로 기독교와 축산업을 때때로 얘기하시잖아요.
몰포시스니 뭐 하여튼 이런 삐뚤삐뚤한 이런 사람들. 난 이해가 안돼. 이해는 되면서 이해가 안돼.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좀 본능적으로 휙 해가지고 지금 서울운동장 앞에 하는 자하디드 젊었을 때 좋았어요. 사무실 커지면서 그냥 휙 뱀 같은 거를 이렇게 장소하고 아무 관계가 없이 거의 폭력적인. 땅을 대접하는게 아니라 땅에다 욕지거리하는 쑥떡 먹이는 건축. 건축 자체로는 재밌는데 그걸 왜 땅에다 세워야 되는지 이해가 안돼. 그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와보지도 않고 그림만 보내고. 그런 건축가들을 싫어하죠. 그런 작품도 싫고.
>> 선생님 그러면 선생님 어쨌든 위대한 건축은 없다. 위대한 건축가를 부추기는 건축교육이 문제다라고 얘기들 하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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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하긴하죠. >> 아 그래요?
몇명은 있어도 되요. 아 그래야 논쟁거리가 생기거든. >> 선생님이 경험한 위대한 건축은?
그런게있죠. 그거는 로마의 판테온에 들어갔을때. 판테온 신전이 있잖아요. 천정에 12미터가 뻥뚫린 그 공간에 들어갔을때 소름이 끼쳤어요. 물론 옛날 건축이지만 공간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별거 아니예요. 그치만 나중에 도면을 보고 그러면 그 이유를 알거 같기도 하고. 거의 전율적인 이렇게. 푹 주저 앉았어.
>> 그것이 역사성 때문일까요? 아니면.
공간이 주는 감동이 있어요. 그게 건축의 순수함이죠. 사실은. 그건 삶도 뭐가 다 필요없고 건축이라고 하는 공간이 만들어낸 진실. 그게 사람을 감동시켜요. 두번째는, 중세수도원. 불란서의 또로네라고 하는 수도원이 있어요. 거기에는 눈물이. 그거는 공간이라기보다도 돌을 다듬은 방식이 수도승 아니면 그렇게 다듬을 수가 없어요. 건물 전체가 돌로 지어졌는데 그걸 다 수도승들이 다듬어요. 거의 빛이 떨어졌을때 난반사 해서 돌아다니는 빛이 그 감동, 공간과 마주치면서 거기서 울어요. 승효상이 ‘아’ 소리 소리 지르고 그 감동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그 빛과 그림자, 그 다음에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신만을 섬기고 살던 수도승들의 손길, 그게 고스란히 남아있거든요. 노동의 흔적, 거의 800년, 700년을 지속하는. 거기서오는 시간의 울림 그거는 어떤 건축도 쫓아오기가 어려워요. 그 다음에 세번째는, 파리의 이거는 현대건축인데 이제, 노틀담 사원 뒤에 있는 유태인 강제수용소에서 학살당한 20만명의 유태인을 추도하는 기념관.
>> 선생님 한 간에 좌파건축가로 불리는 것에 대해서 선생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웃긴다고 생각하죠. 좌파. 그거는 정치적 쇼의 정신을 잃은 사람들의 망발 같은거죠. 김대중 빨갱이라는 그거 똑같은거죠. 노무현 빨갱이 뭐. 그 사람들 다 빨갱이 아니거든. 빨갱이면 또 다 좌파냐. 그렇지도 않은거고. 거기다 건축가가 좌파다. 그 사람들과 조금 가까웠다 해가지고 붙힌 이름. 신경 쓰지도 않을 뿐 만 아니라 관심 없어요. 왜냐하면 넌센스와 같은 얘기기 때문에.
>> 선생님 또 박경리 선향사업의.. 어. 건축담당이죠.
>>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 선생님이 최고의 책으로 치고 계시는데요. 토지에서 어떤점을 건축가로서 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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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는 한 3년된 이야기인데. 박경리 선생님 김약국의 딸들 뭐 이런거 젊었을때 읽어서 잘 알고 있지만 선향사업 건축담당을 하면서 많은 공부를 했어요. 그리고 박경리 선생님의 딸, 그 문학관의 대표인 김영주 관장도 만나보고 또 많은 이야기를 직접 듣고 그러면서 특히 박경리 선생님을 공부한 최유창 교수라고 있어요. 거기에 강의도 듣고, 사설강의. 안상수 선생하고 나하고. 그러면서 토지를 읽어야겠다. 김민기라고 노래하는 그 친구가 선향사업의 참여하면서 토지도 다 못읽고 그러면서 그 다음날로 21권을 보내왔다. 그래서 지금 1월달부터 시작해서 18권째를 다 읽었어요. 그러면서 느낀 몇가지가 있는데 저는 그냥 재밌는 소설인줄 알았어요.18권째 읽으면서 느낀것은 첫째, 이거는 어떤 역사책보다도 훌륭한 역사책이다. 19세기 말에서부터 해방때까지 거의 반세기를 다룬 한국 근대사의 가장 신명나는 역사서이다. 두번째, 이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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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관한 이론서적이다. 불교. 거기에 등장하는 스님들이나 스님을 추종하는 세력들 모두가 전부 불교의 정신과 연관되어 있어요. 서희네 집안도 다 스님들하고 연관돼. 거기서는 나오는 수많은 불교의 이야기들이 어떤 경전보다도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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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돈된 불교서적이다. 세번째로, 19세기 말에서 해방되기까지 내가 살지 않은 시절의 수많은 민초들의 대화, 대화에 나는 정신을 엿들을 수가 있다. 반세기의 민초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가 있다. 그 어떤 힘으로 그렇게 하느냐. 등장하는 인물이 다 주인공이야. 한 인물이 등장하면 그가 화자가 되는거야. 수백명의 주인공이 있다. 거의 엑스트라로 나온 사람도 전부 하늘의 별같이 반짝거리는. 그 다음에. 반짝이는 별들이. 그러니깐 토지는 거의 우주적 소설이다, 나 그렇게 보는거다. 최유찬 선생님도 그렇게 얘기했지만. 한가문의 몰락을 다른 것이 아니라, 민초들을 통해서 별들로 부활시킨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오냐. 거기는 딱 두가지 방언이 나옵니다. 경상도 말과 함경도 말. 그래서 듣도 못한 경상도 말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 그래서 괄호하고 표준말로 다 번역을 해. 그니깐 한국의 언어사전이다, 이렇게 보는거죠.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소위 동학난이라고 하는, 그걸 중심으로 그것이 중심세력, 아류세력, 추종세력과 독립운동과의 느슨한 수많은 관계들. 이건 일제강점기의 지식인들의 퇴폐적인 문화와 또 저항하려는 힘과 민초들이 독립을 하려고 하는 의지와 그러면서 동학난에 대한 큰 점수를 주죠, 거기서. 한반도 역사에서 민초들이 최초로 들고 일어난 이 사건에 대해서 새로운 각도로 조명을 하고 있다. 그 다음에 끝으로 그런데 소설은 또 소설이다. 그런 여러가지를 이렇게 뭉뚱그릴 수 있는 스무권을 통틀어서 모든 문장들을 이렇게 매끄럽게 딱딱 거의 심혈을 기울인 이거는 대단한 소설이다. 그런점때문에 지난 8개월이 행복했죠.
>> 선생님이 어쨌든 평생 선생님 집이라고 얘기하시는 거를 가지지 않으셨잖아요. 선생님의 집을 가지지 않은 사람으로서 선생님이 집을 갖는다면 어디에 있고, 어떤 집일까요?
농촌쯤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마당의 흙이 있고 나무가 한두그루가 자라고 있고 그러면 됐지 뭐. 그 다음에 집도 크지 않고 뭐. 그냥 소박한. 대충 설계도 해놨어요. 흙으로 지을거야. 땅만 있으면 짓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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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이 저한테 얘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거. 선생님한테 어쨌든 본다는 것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있었고 평생동안 많은 것을 보았고 그리고 많은 것을 그려왔잖아요. 선생님은 무엇을 보신 것 같고 어떻게 보신 것 같으세요?
뭐 남들보다 특별한 감각이 있다기보다 보는 방식이 조금 거리를 두고 보는 조금은 아웃사이더 방식이라고 그럴까 그런 거리를 두고 본다 그런게 있고. 두번째는 예사롭게 보지 않는다. 굉장히 섬세하게 보는 것 같애 모든 것을, 섬세하게. 그런데 그게 놓쳐지지가 않고 자꾸 기억에서 축적되는. 보는 것이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은 흘러가지 않는다. 고여있다. 이를테면. 내가 한 조그만 여행스케치들 중에 많은 부분은 외워서 그린거거든요. 현장에서 그린게 아니라. 보고 기억하고 끄집어내고 하는 기능이 조금 발달해있다고 그럴까 좀 그런거 같아. 본다는 것은 어떻게보면 또다른 삶이다. 나를 성장시킨다 뭐 좀 그런거. 끊임없이 이렇게 내부를 교란시키는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을때 전체가 다시 재조정되고 뭐하는 이런 그런 체계가 있었던 것 같애. 요새는 조금 덜 하지만. 요새는 가급적 안볼려고 그러죠. 보면은 또 어떤 문제가 생길까봐.
>> 선생님한테 이제 마지막 질문을 일단, 오늘 마지막 질문을 하려고 하는데요. 선생님에게 말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말은 그냥 나오는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면의 것이 다 나오는거죠. 그래서 좀 웃기는 얘기지만 나는 생각한 것을 말할 수 뿐이 없어요. 그 다음에 세번째로 말한 것은 어떻게해서든지 행동으로 옮기려고 애를 쓰죠. 진정한 지식인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일치하는 사람이거든요. 내가 지식인이 될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게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되는 것이다. 그래서 말은 우연히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보니깐 조금 건조하기도 하다. 내 주변이. 내가 제일 못하는 것이 그 뭐라고 그러나 너스레떨고 뭐 농담하고 뭐 이런 히죽히죽하고 하는 이런걸 잘 못하거든요. 농담은 하지만. 하는게 항상 너스레 떨면서 구라치고 이런걸 좀 싫어하는거 같애. 그니깐 통제없이 나오는 말들. 오히려 말은 나는 글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래서 강의할때도 교안이 없어도 마치 책보고 읽듯이 말이 나오는 것이 내면에서 그걸 다 통제를 해가지고 디스패칭을 하는거죠. 적절한 단어, 순서 이런것에 대해서. 그 오늘 인터뷰에서도 내 망설인 적이 없거든요. 망설인다기 보다 생각을 조금씩했죠. 말하면서. 왜그러냐.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말로 나오지가 않더라고요. 그것이 나의 말이다. 그래서 제가 어느 책 서문에서 글은 말의 그늘이다 그런 얘기를 한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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